[소정선-칼럼] 이제는 참회록을 쓰자

소정선 칼럼 / 기사승인 : 2017-04-23 23: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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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선 칼럼리스트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기고] 일제하 저항시인 윤동주는 그의 유명한 시 ‘참회록(懺悔錄)’을 통해 암울한 현실에서 꿈도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자책하고 반성한다. 독백적 어조로 자기 성찰적 삶의 태도를 진솔하게 표현한 이 시 전편에 흐르는 정서는 '욕됨, 부끄러움'이다. 그는 욕된 자기를 확인하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 의지를 다짐한다.

참회(懺悔)는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는 것이다. 이 시가 더욱 감명 깊은 것은, 이 젊은 시인이 살아온 나날이 고작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에 불과했지만 ‘과거의 삶 전체’로 규정하면서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라고 민족과 역사 앞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삶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반성한 점이다.

참회록의 대표 주자는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다. 그의 참회록은 ‘입신출세를 위해 수사학 등을 배울 때 빠졌던 방탕한 생활 등 스스로 죄가 깊다는 것을 단지 표면적 현상 만으로서가 아니라 행위의 밑바닥에 있는 동기 자체로부터 고백하고 엄격히 비판한 점’에서 참회록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보자. "나는 그 시절을 돌아볼 때면 두려움과 혐오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곤 한다. 그 시절 나는 도박을 벌였고, 간통을 했으며, 사기꾼이었고, 난잡한 성행위, 거짓말, 도둑질, 알코올 중독, 폭력, 살인 등 손대지 않은 범죄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칭송을 받았다. 동료들은 나를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으로 여겼고, 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참회록'을 통해 자신의 비밀을 공개함으로써 역사 앞에 사죄한다. 자신의 '위선' 또는 '가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용기가 그를 대 사상가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최근 여러 정치인들의 회고록과 자서전이 속속 발간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산업화시기의 정치 풍운아 김종필, 12.12 사태의 주역 전두환, 송민순 전외교장관의 회고록 등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관적 서술기록이 으레 그렇듯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쟁도 함께 일고 있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면서 적은 기록이다. 타인이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평전이나 전기와 달리 기술, 구술 주체가 본인이다. 그래서 왜곡이나 미화 논란에 빠지고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김종필은 ‘김종필 증언록’에서 “김재규는 온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한 번 흥분하면 전후좌우 분간을 못하고 마구 욕을 해댈 정도로 분노조절장애를 안고 있었다”며 김재규의 10.26을 단순 우발 사건으로 평가 절하했다. 그날의 사건이 단순한 김재규의 발작증 때문이었다는 분석은 수 십 년간 한국정치를 주물러온 노정객의 원인 분석치고는 격이 한참 낮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인물의 비중에 비해 회고록의 깊이가 없다. 자화자찬의 성격이 강하며 반성이나 후회의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군사정권하의 2인자로서 과오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면서 옛 기억을 되살린 추억담으로 평가한다.

스스로를 5.18의 희생양 중 하나로 주장한 전두환의 회고록도 자기변명 기록으로 비난을 사고있다. 그는 “군인이 시위대에 희생 됐기 때문에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발포했다.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며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은 ‘현장 지휘관들에 의한 자위권 발동’이다”라는 종전 주장을 되풀이 했다. 12.12 군부 쿠데타 주역인 본인이 주도한 5.18 민주항쟁 무력진압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근 대선 상황에서 논란의 핵으로 등장한 송민순회고록은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현재 진행형이다. 참여정부가 2007년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북한의 의사를 물어봤다는 이른바 '대북결재' 논란이다. 지난해 회고록 발간 당시 한차례 논란이 있었고 최근 대선 상황에서 재 점화됐다. 유엔결의안 ‘찬성’을 고집한 송 전 장관은 지난 20일 J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2007년 11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과 관련, 북한에서 보낸 답변을 정리한 문서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메모 등을 공개했다. 이에 당시 주무부처장이었던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과 국정원장 및 기타 회의 참석자들이 송 전장관의 착각임을 지적했지만 논란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따지고 보면 북한의사 타진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한 점은 아니다. 외교적 필요성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위여부 논란의 영향이다. 문후보 상대들은 일제히 후보의 안보관으로 연결시키면서 공세를 퍼붓는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북한 의사를 사전 타진을 주도했다는 비난이다. 그러나 당시 문후보는 주요 관계 당사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찬성을 했다는 점에서 자서전 논란은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송 전장관의 착오를 지적하지만 본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주관적 서술인 자서전 내용에 대해 사실 확인 논란을 벌인다는 것도 의아하고 또 그것을 이번 대선과 연결시키는 자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 회고록은 자신이 선택한 기록과 기억에 의존한 산물이다. 객관적 상황도 주관적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대부분 자신이 훌륭하고 옳았다는 것을 기억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한다 해도 회고록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 자기확신에 빠져서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상황을 왜곡하기 쉬운 만큼 주의를 기울”일 것을 주문했다.

최근 실험심리학 계간지(Quarterly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에 실린 영국 사우샘프턴대학교의 인간심리에 관한 논문은 이처럼 ‘증거가 있어도 자기의견을 고집’하는 사례를,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 편향'의 하나로 분석한다. '이기적 편향'중에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를 무시하는 현상이 '확증 편향'이다.

1925년 이승만의 탄핵에 이어 헌정사상 두 번째로 탄핵된 박근혜 전대통령이 청와대를 물러나면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한 발언의 근저에는 바로 이 ‘확증편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사람들은 자서전에서 언제나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기 바쁘다. 심지어 위기에 빠져도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재미로 풀어간다.

최근 회고록 논란을 보면서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존재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과거 선조들이 왜 자기반성적 참회록을 썼는지 되새겨 보게 된다. 사실이 중요하다면 컴퓨터가 있지 않는가. 인류 최고의 지혜를 담았다는 바둑을 정복한 ‘알파고’와 의사를 대신한다는 ‘왓슨’이 주름잡는 시대에 웬 사실 확인인가? 사실영역은 컴퓨터나 AI에게 맡기자.

그래서 이제 자서전보다 참회록을 쓰자. ‘자기변명록’이라면 출판비용이 아깝지 않은가? 자기반성은 인류 지성을 풍성하게 한다. 반성적, 고백적, 참여적, 자기 성찰적, 미래지향적 서술이 생명력이 크다.

선조들이 물려준 땅을 두 동강 내고 고토 회복도 못하는 현실에서 이 땅의 진로를 책임진 정치인들이 소소한 사건의 사실여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시대착오적 망동 아닌가?

역사의 쇠망과 흐려진 민족혼을 의미하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을 닦고 또 닦아 망국의 현실을 일깨우고 24살의 생을 반성한 윤동주 선생에 부끄럽지 않은가? 회고록 당사자들이 윤동주 선생처럼 ‘욕된 자기를 확인하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 의지를 다짐’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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