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희의 스포츠 초대석] ⑥ '원조신궁' 김진호

심재희 / 기사승인 : 2011-11-29 10:50:29
  • -
  • +
  • 인쇄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주인공 "연습을 시합같이 즐겨라!"

kjh.jpg

[데일리매거진=심재희 기자] 대한민국 양궁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이다. 세계 무대에 첫 선을 보인 1970년대 말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실상부한 최고의 '신궁국가'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 스포츠 초대석의 손님은 '원조신궁', '신궁효시' 등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해 무려 10개의 금메달을 쓸어담은 김진호(현 한국체육대학교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모든 후배 궁사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최고의 신궁' 김진호. 이제는 교수로서 제자들과 함께 양궁의 또 다른 맛을 알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나눠봤다.

# '여고생 신궁' 김진호

1979년 독일 베를린은 '무서운 10대 여고생'의 출현으로 난리가 났다. 앳된 외모를 가진 만 18세의 동양 소녀가 당기는 활 시위에 모든 이들의 시전이 집중됐다. 혜성처럼 나타난 10대 여고생은 백발백중의 실력을 발휘하며 서양인들의 눈을 의심케 만들었다. '원조신궁' 김진호의 존재가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김진호는 당시 6개 부문 가운데 5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대회 5관왕. 세계 무대에 처음으로 출전했던 한국 양국은 '여고생 신궁' 김진호 덕에 단숨에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뭣 모르고 참가한 세계 대회였어요. 세계선수권대회의 비중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없을 정도로 순진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겁이 없었기에 더 자신 있게 경기를 펼쳤던 것 같아요." 전무했던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달성에 대해서 정작 김진호 자신은 겸손한 대답을 내놓았지만, 그는 이전부터 최고의 궁사로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피 말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1위로 통과했고,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어린 나이라 '경험 부족'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특유의 '패기'로 부담감을 극복하면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무려 5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만 1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김진호는 이미 '준비된 신궁'이었다.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대회에서 또 한 번 5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1984년 LA올림픽 전초전 성격을 띠고 있던 대회에서 최강자의 위용을 뽐내면서 또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79년 베를린세계선수권대회 때보다는 철이 좀 더 들어서 1983년 LA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것 같습니다. 우여곡적이 있었기 때문에 목표의식도 뚜렷했고 집중도 잘 되었습니다. 이듬 해 올림픽이 열리는 곳에서 경기가 펼쳐졌기 때문에 더 힘을 내서 시합에 임했습니다." 4년 전 여고생이었을 때보다 경험과 관록을 더 쌓은 '원조신궁'이 또 한 번 세계를 제패했던 것이다. 말이 쉬워서 금메달 10개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번이나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일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진호를 '최고의 신궁'이라고 표현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 무관의 챔피언

김진호는 1979년 베를린세계선수권대회 5관왕을 차지하면서 이미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10대 후반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되돌아 보면, 그 때가 선수로서 베스트였습니다. 내 기록을 내가 계속해서 깨뜨릴 정도로 상승세를 이어갔죠." 스스로가 자신 있게 지목한 전성기가 바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사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김진호는 최고의 전성기에 최고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모든 선수들이 꿈꾸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지 못하면서 '비운의 스타'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나서지 못했을 대는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당시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올림픽이 그리 대단하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김진호는 냉전체제로 공산권 국가들만 참가하며 '반쪽 올림픽'이 되었던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당시의 기억에 대해 "아쉬움도 허탈함도 없었다"고 되뇄다. 4년의 시간이 흘러 LA올림픽. 김진호는 소위 말하는 우승후보 0순위였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전 똑같은 자리에서 펼쳐졌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에 올랐기에 김진호의 정상 등극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동메달. 또 한 번 올림픽과 제대로 된 인연을 맺지 못하면서 '무관의 챔피언'이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올림픽 챔피언에 오르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아쉬움이 많은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큰 미련이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1983년 LA세계선수권대회는 LA올림픽을 바라보고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 스스로도 올림픽에서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결과가가 못내 아쉽게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양궁 선수단이 너무 일찍 미국으로 향하는 바람에 컨디션 조절이 어려웠지만, 이도 지나고 보니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라며 이미 다 지난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어 "오히려 4년 전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에 모스크바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죠"라며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한 아쉬움을 스스로 달랬다.

# '행복한 은퇴'를 선택하다!

김진호는 LA올림픽이 끝나고 활을 놓았다. 올림픽에서의 실패 때문에 조용히 은퇴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활을 놓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 대학원을 다니면서 또 다른 꿈을 그려갔던 김진호였다. 은퇴를 한 지 4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김진호는 어머니의 권유로 다시 활을 잡게 되었다. 좋은 모습으로 은퇴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반들어 선수 복귀를 결정했다. 그리고 다시 '신궁'의 모습을 되찾으면서 국가대표로 복귀했다. 다음 목표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이었다.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김진호는 3관왕에 올랐다. 과거 그가 발휘했던 실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은퇴했다가 다시 활을 잡았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김진호는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했고,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라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겨내면서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을 드러냈다. 아시안게임 3관왕 등극으로 올림픽에서의 부진은 어느 정도 만회됐고, 주위에서는 또 한 번의 '올림픽 도전'에 대한 기대가 부풀러 올랐다. 그러나 김진호는 올림픽이 아닌 은퇴의 길을 단호하게 선택했다.

세계선수권대회 10개의 금메달. 아시안게임 3관왕. 실력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였지만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으니 당연히 '올림픽 챔피언'에 도전할 것이라는 예상이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2년 뒤 올림픽은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펼쳐지지 않았던가. 때문에 그의 은퇴를 두고 주위에서 아쉽다는 반응이 쉴 새 없이 나왔다. 하지만 김진호의 은퇴 결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행복한 은퇴'라는 표현을 썼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도전할 때부터 확실하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체력이 이전만 못 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치열한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러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잘 하는 후배들이 있었기에 속 시원하게 은퇴할 수 있었죠." 결국 올림픽 챔피언에 오르지 못했지만 김진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행복한 은퇴'를 선언했고, 자신의 또 다른 목표를 위해 '공부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이후 은퇴를 선언한 김진호는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 조교로 활동한 뒤, 1995년 전임교수가 됐다. 어느덧 교수가 된 지도 17년째. 하지만 김진호 교수는 아직도 제자들은 가르치는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가 불만족스럽단다. 자신이 선수로서 보여줬던 모습을 제자들에게 잘 전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처음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전수하면 매우 잘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선수로 뛰는 것과 지도자로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내가 선수로 뛰던 때와는 시대 자체가 많이 바뀌었죠. 선수들의 재능과 여러 가지 외부환경도 그 때와는 많이 다른 게 사실입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개나 금메달을 따낸 '신궁'이 17년 동안 공부하고 또 공부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과제가 더 쌓이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김진호 교수는 대화 중간에 "지도자로서 재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며 어색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저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됐습니다. 모든 선수를 최고로 키울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선수들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소질 등을 잘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느끼게 됐죠.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가 가장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겸손한 성격이라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지만, 교수로서 지도자로서 제자들의 성공을 이끌어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모습이 확실히 비춰졌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활 시윈을 당기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연습을 시합같이!"라는 말이 곧바로 되돌아 왔다. 연습을 할 때, 최고로 집중해서 중요한 시합처럼 경기를 치르면 시나브로 기량이 향상한다는 것. 연습을 시합같이 생각하면서 땀을 흘리면, 정말 중요한 시합을 연습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김진호 교수가 생각하는 '백발백중의 비결'이었다. 이제는 교수로서 후배들의 장점과 단점을 짚어주면서 양궁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김진호 교수. '원조신궁'으로 과녁 정 중앙을 꿰뚫던 것처럼, 지도자로서도 후배들의 '백발백중'을 계속해서 잘 이끌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데일리매거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뉴스댓글 >

주요기사

+

핫이슈 기사

칼럼

+

스포츠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