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다음달 전기요금 10%대 인상안을 추진하면서 적잖은 파장이 일고 있다.
전기요금 인상의 불가피성이나 두 자릿수 인상률은 기존의 한전 입장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이를 요구하는 절차나 방식이 종전 관례를 깬 것이어서 배경을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21일 한전에 따르면 지난 17일 김중겸 한전 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이사회를 열고 다음 달부터 전기요금 평균 10%대의 인상안을 의결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사내이사 7명과 사외이사 8명 등 15명의 이사회 멤버 가운데 3명을 제외한 12명이 참석했으며, 이날 의결은 사외이사가 주도한 것으로 한전은 전했다
이 같은 의사결정 방식은 절차상 문제는 없지만 예전과는 달리 정부와의 사전 협의가 없이 단독으로 안건을 의결, 정부에 일방적으로 요금 인상안을 전달한 것이어서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기요금 조정절차는 한전이 요금인상안을 논의한 뒤 이를 지식경제부 전기위원회에 신청하면 지경부가 기획재정부 등 관련부처와 협의를 거쳐 인상안을 최종 결정하고, 이를 지경부가 한전에 전달하면 한전이 이사회를 열고 의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한전 이사회가 일방적으로 전기요금 인상안을 단독으로 의결해 정부에 사실상 '통보'했다.
만약 지경부 장관이 한전 이사회의 의결안을 승인하지 않고 반려할 경우에는 한전 이사회의 요금 인상안은 사실상 효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를 놓고 일부에서는 지식경제부와 한전이 정부가 선임한 사외이사를 앞세워 물가조정의 주도권을 쥔 기획재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 한전 이사회 가운데 사외이사(총 8명)는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김경민 한양대 교수(정외과), 남동균 전 기획예산처 성과관리본부장, 신일순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 안현호 전 지경부 1차관, 이태식 전 외교부 차관, 이기표 부산푸드뱅크 이사, 정해주 전 통상산업부 장관이다. 대부분 전직 관료나 교수들이 주축이다.
때문에 겉으로는 비교적 잡음을 일으킬 소지가 적고 일정수준의 신뢰성과 중립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제3자를 통해 한전과 지경부의 입장을 물가당국에 강하게 어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부는 이미 올해 8월1일부로 전기요금을 평균 4.9% 인상했지만, 이는 한전의 적자구조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당시 요금인상 협의과정에서는 지경부가 10% 안팎의 요금인상안을 들고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벌였지만, 서민물가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5% 미만 수준으로 결정되면서 지경부 역시 요금안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 때문에 한전과 지경부 내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요금 추가인상 가능성을 제기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특히 지경부의 지시에 따라 요금을 조율하거나 수용해 온 산하기관 특성상 한전이 정부에 일절 언급도 없이 단독으로 요금인상안을 의결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한전 관계자는 "그 부분에 대해선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지경부 관계자는 "한전과 사전에 협의한 건 없었다"면서 "일단 한전의 인상안은 기재부와 협의를 거쳐 논의해야겠지만 요금인상 시점은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외이사들이 총대를 메고 요금폭탄을 던 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김쌍수 학습효과'를 거론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올해 8월 전기요금 인상분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전기요금은 원가의 90.3%로 전기를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요금체계다. 게다가 한전은 최근 3년 연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지난해 영업적자 1조8000억원, 누적적자 33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결국 김쌍수 전 한전 사장은 3년 임기의 만료를 앞두고 소액주주들로부터 원가에 못 미친 전기료로 인해 한전이 2조800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당시 김 사장은 자신을 "식물사장"으로 표현할 만큼 무력감을 나타냈다.
한전 입장에서는 사실상 가장 현실적인 해결수단이 요금인상카드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정부에 요금인상 조차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고 종전처럼 정부의 결정만 소극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자칫 김 전 사장과 함께 사외이사들이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한 이유로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이사회 단독의결은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사외이사들의 '몸 사리기'라는 해석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지경부 관계자 역시 "김 전 사장의 손해배상 소송이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고 아마 몇 년에 걸쳐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이번 요금인상안 의결도 소송 때문에 사외이사들이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데일리매거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