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하고 넉넉한 한가위가 돌아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기다릴 것 같은 추석 명절이지만, 명절하면 "겁난다"는 말부터 먼저 꺼내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이다.
정치인들에게는 명절이 1년 중 가장 바쁜 기간이다. 의정활동을 쉬는 대신 지역구를 관리하고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민심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가족, 친지들과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한가로운 명절은 상상할 수도 없다.
과거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보통 명절이 되기 일주일 전부터 지역에 상주하며 선물을 돌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역 노인정과 어린이집 등을 돌면서 라면과 연탄 등을 실어 날랐고, 유명 인사들의 자택에는 산삼과 명품 시계 등 고가의 선물을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대이동'을 앞두고 국회의원을 통해 귀성 열차표를 구하려는 민원도 끊이지 않았다. 16대 국회까지만 해도 당시 건설교통위원회 소속 의원실은 명절이 되기 한 달 전부터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달라진 풍속도…"잘못 받으면 최고 50배 물어야"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현금과 고가의 선물을 돌리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이제 정치인들의 과도한 명절 선물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매년 설과 추석 전 명절맞이 마을 행사에 대한 불법 찬조금이나 인사장 발송, 금품 제공 등에 대해 대대적인 특별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불법으로 선물을 제공한 정치인만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정치인으로부터 제공되는 금품이나 식사를 제공받으면 받은 액수의 최대 50배까지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특히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오는 10·26 재보선과 내년 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입후보예정자들이 불법 선거운동을 벌일 가능성을 염두하고 지난 6일부터 금품제공행위 집중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선관위가 밝힌 중점 단속대상은 ▲ 추석 명절을 빌미로 선물·금품·음식물을 제공하는 행위 ▲연구소·산악회·포럼 등 선거를 위한 조직을 결성·운영 또는 확충을 위해 금품 등을 제공하는 행위 ▲ 입후보예정자가 참석하거나 관련된 행사에서 제3자가 금품·음식물 등을 제공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제공하게 하는 행위 등이다.
선관위는 "선거법 위반행위에 대한 신고자에게 최고 5억원까지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며 "신고자의 신원이 절대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있는 만큼 위반 행위를 발견하면 대표전화 1390번으로 적극 신고해줄 것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 정치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선물은?
최근에는 정치인들이 가까운 지인이나 지역 당원협의회 조직 등에게만 1~2만원 내외의 선물을 돌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명절 선물은 바로 지역 특산물이다. 지역을 사랑하는 애향심을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역을 홍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 추석에서 사회각계 주요인사와 사회적 배려계층 등 약 6000여명에게 경남사천 멸치와 전남여수 멸치, 평창 대관령 황태채로 구성된 선물세트를 전달했다. 수산물 소비를 촉진하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경남 남해 출신의 박희태 국회의장(경남 양산)은 지난해까진 고등어, 올해는 멸치를 선물했다.
전남 나주의 민주당 최인기 의원은 배, 경북 안동의 한나라당 김광림 의원은 고등어를 주로 선물한다.
경북 포항과 울릉군을 지역구로 둔 이상득 의원은 지인들에게 명절 선물을 보내는 경우에는 반드시 건어물과 명이나물 등 울릉도 특산품 세트를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영양 출신인 이재오 특임장관은 고추장, 제주가 고향인 한나라당 원희룡 최고위원은 주로 감귤을 선물한다.
전남 신안이 출생지인 한화갑 평화민주당 대표는 김이나 미역, 해초 등의 지역 특산물을 돌린다.
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을 지역구로 둔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명절 때면 고민이 많다. 영광 굴비가 너무 고가인 탓에 최근에는 모싯잎 가루와 차 등으로 구성된 선물세트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 "평범한 것은 싫다"…이색선물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과거 야당 총재 시절에 '행동하는 양심', '인내천(人乃天)' 등 자신이 직접 쓴 휘호를 선물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도 집안 거실에 친필 휘호를 걸어놓고 '가보'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농민 출신으로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박경수 전 의원은 집 앞 대문에 걸어 놓는 문패를 선물해 지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민주당 의원 시절에 지인들의 한자 이름을 새긴 옥도장을 선물로 돌리기도 했다.
한나라당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은 매년 지인들에게 직접 선정한 책을 선물한다. 이번 명절에는 최근 정치권에 '복지 포퓰리즘'이 논란이 되고 있는 만큼 미국의 과잉 복지정책을 지적한 라이시 교수의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를 선정했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도 이번 명절에 동료 의원과 민주당 출입기자 등 지인들에게 부인이 직접 담근 김 장아찌와 버섯 장아찌를 선물했다. 정 최고위원은 올 구정 때도 손수 만든 '홈메이드 고추장'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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