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매거진=박대웅 기자]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의 모 농협 지점을 방문한 조모(39)씨는 은행직원의 말에 발을 동동굴렸다. "지금 신규 대출이 안되니 9월 이후에나 다시오라"는 은행 직원의 말에 조 씨는 "당장 집주인이 월세와 보증금을 올리겠다는 상황인데 거리로 내앉거나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를 찾는 수 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17일 금융당국은 800조 규모의 시한폭탄인 가계부채 문제의 대안으로 대출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18일, 농협·신한·우리은행은 신규 가계대출을 중단했다. 18일 은행권에 따르면 은행들은 당국으로부터 월 대출 증가율을 0.6% 수준에 맞추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달 들어 보름여 만에 0.68%의 증가율은 보인 농협은 잔금 납부를 제외한 주택담보대출을 이달 말까지 전면 중단했고, 0.57%의 증가율을 기록한 신한은행은 전세자금 대출과 같은 서민 지원 대출을 제외한 신용대출을 본부 심사에 올리기로 했다. 증가율 0.52%인 우리은행 역시 신용대출 심사 강화 방침을 영업점에 하달했다가 하루 만에 철회했다. 0.47% 증가한 하나은행과 0.26% 증가한 국민은행은 신용대출 요건을 까다롭게 변경했다.
은행들은 금융 당국의 권고에다 신용대출의 상당 부분이 주식 투자에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가계대출 전면 중단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17일까지 기업·국민·신한·우리·농협·하나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의 가계대출이 1조 673억으로 늘었으며, 이 가운데 신용대출 증가분이 7859억원으로 73.6%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주택담보대출은 7월 말보다 0.1% 늘었지만, 신용대출은 1.3% 증가했다. 한국거래소는 17일 현재 소액투자자(개미)들이 주식시장에 1조 9258억원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2조 756억원을 투입한 기관과 큰 차이가 없는 액수라는 것이 한국거래소의 설명이다.
가계대출을 통한 주식시장의 지나친 자금유입을 막겠다는 당국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언발에 오줌누기'식의 구태의연한 방법이 실효성을 가져올지 우려된다.
금융위는 지난 6월 가계부채 종합대책을 발표에도 불구하고 대출 증가세는 더 가팔라져 억제에 나섰다고 밝혔다. 지난달에 4조4000억원이 늘었고, 8월들어 2주만에 2조원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계대출이 갑자기 증가한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5월 기준으로 은행권 가계대출은 440조원으로 1년 사이 24조원이나 늘었다. 은행들이 앉아서 이자 수익을 챙길 수 있는 가계대출 늘리기에 혈안이 됐기 때문이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풀어가자던 금융당국이 발등이 불이 떨어지자 가계대출 전면 중단이라는 칼을 뽑아 든 것은 정책실패를 서민의 부담으로 돌리는 비겁한 처사다.
'가계부채 800조원 시대'. 가계부채는 한국경제를 파탄에 이르게할 무시무사한 '시한폭탄'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당국은 문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제라도 서서히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은행의 대출경쟁에 제동을 걸고, 금리구조를 바꿔나가는 등의 근본대책을 펼쳐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시장의 불안을 키우고 역효과마저 우려되는 '가계부채 전면 중단' 대신 정부와 금융당국은 보다 근본적이고 효율적인 대처방안을 찾는데 골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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