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개월여 간 치열한 교전을 거듭하며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리비아 사태가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사망으로 일단락됐다.
튀니지 재스민 혁명이 리비아를 관통한 것은 지난 2월15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시작돼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번진 민주화 시위의 불꽃은 결국 이날 리비아에서도 처음으로 불타올랐다.
리비아 제2의 도시 동부 벵가지에서는 2006년 이슬람주의자 집회 당시 희생된 14명의 유족들이 인권변호사 페티 타르벨을 석방해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재스민 혁명과 함께 리비아 시민들을 자극했고 이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2년 동안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한 채 리비아를 독재해 온 카다피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카다피는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군경을 앞세워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사망자는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무장으로 맞섰다. 리비아 반정부 시위가 내전으로 비화된 기점이었다.
반정부 시위가 처음 시작된 벵가지를 중심으로 시민들은 카다피에 대항한 무력 투쟁을 이어갔다. 카다피는 박격포와 헬리콥터를 동원하는 등 친위부대에 대대적인 시위대 진압을 지시했다.
반정부 세력은 3월 반군국가위원회(NTC)를 설립해 조직적인 반(反)카다피 투쟁을 전개했다. 카다피 정권의 핵심 거점인 트리폴리를 향해 천천히 진격해 나갔고 이들은 '시위대'가 아닌 '반군'으로 통칭됐다.
하지만 카다피가 40년 이상 구축해 온 철옹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카다피군은 최신식 무기와 강력한 전략을 앞세워 벵가지를 향한 반격을 감행했다. 반군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벵가지에선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3월17일 카다피군의 민간인 학살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리비아 영공에 비행금지구역(NFZ)를 설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틀 뒤 프랑스 공군의 라팔 전투기가 리비아 상공에 출현해 카다피군의 탱크와 병력 수송 차량, 지대공 미사일 발사대, 지휘소 등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주축이 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을 중심으로 일부 아랍 국가들까지 참여한 공습이 강화되면서 카다피군의 군사력은 눈에 띄게 위축됐다. NTC는 3월23일 벵가지에서 임시정부 출범을 공식화했다.
이후 한동안 교착 상태를 이어가던 중 6월 말부터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토군의 공습으로 카다피군의 전력은 점점 무기력해졌고, 국제사회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주요 회원국들이 참여한 '리비아 연락그룹'을 구성했다. 7월 중순 리비아 연락그룹은 NTC를 리비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했다.
서부의 전략 요충지인 자위야와 즐리탄을 차례로 접수한 NTC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트리폴리를 향해 계속해서 진격했고, 위기를 느낀 카다피군은 8월15일 처음으로 스커드 미사일까지 동원하며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토의 지원 속에 NTC군은 8월20일부터 트리폴리 함락을 위한 최후의 작전을 감행했다. 8월21일 수도 트리폴리에 진입한 데 이어 이틀 뒤에는 결국 카다피의 요새인 바브 알-아지지야가 반군에 함락되면서 전쟁은 시민의 승리로 끝났다. NTC군이 8월23일 트리폴리 전투에서 승리를 선언함에 따라 국제사회의 환영 메시지도 잇따랐다.
카다피는 독재자에서 도망자로 전락했다. 두 달여에 걸쳐 추격전을 펼치던 NTC군은 20일 시르테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카다피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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