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세상이야기/신춘기행④] 남산에 일제의 조선신궁, 경성신사, 노기신사등 신사만 3곳

남영진 논설고문 / 기사승인 : 2019-05-16 10: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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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한반도에 1,000여개 신사 설치 30년대 이후 신사참배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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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남영진 논설고문


[데일리매거진=남영진 논설고문] 지난 5월12일 토요일 4주 만에 남산 길을 다시 찾았다. 10여년을 이어온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 동기들이 가끔 가는 야유회 길이었다. 지난달 한국일보 거북이 마라톤행사에 참석해 남산의 벚꽃향연에 매력을 느낀 나는 이번에는 어떤 꽃들이 만개했을까 기대가 됐다. 동국대 건너편 태극당에서 10여명의 동기와 부부들을 만났다. 60-70년대 ‘모나카’와 단팥빵으로 유명했던 태극당이 인테리어만 바꾼 채 그전 장소에 버티고 있는 것이 반가웠다.


종로2가의 고려당, 크라운 베이커리와 함께 ‘빵집’의 대표 주자였던 태극당 안에 예전에 쓰던간판 사진과 ‘카운타’표시 목판이 65년 전통을 자랑했다. 해방직후인 46년 창립해 지금은 3세가 경영하는 대표적인 한국의 노포(老鋪)다.


남산의 동쪽 입구인 장충단공원을 지나 국립극장 옆으로 남쪽 산책길로 들어섰다. 한 달 전 그 많던 벚꽃과 철쭉이 거의 없어지고 연두 빛 나뭇잎과 풀들이 반겼다. 나이 들어가면서 ‘꽃보다 푸른 나뭇잎이 더 정겹다’란 말이 실감났다.‘남산위의 저 소나무’보다 활엽수들이 많아 늦봄의 신록이 싱그러웠다.


이번엔 화두가 남산에 있던 일본 신사(神社) 이야기였다.


남대문에서 올라 백범광장 앞의 전에 어린이회관, 남산식물원 ,남산도서관이 있던 장소가 일제 때 신사자리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동 세종호텔 건너편에서 적십자회관으로 올라가 숭의여대와 리라초교 터에 또 다른 신사가 있었다고 해서 헷갈렸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남산에 3곳의 일본 신사가 있었던 것이다.


신궁(神宮)과 신사의 차이였다. 일제는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남산 백범광장 터에 일본의 국조신과 일왕가계를 모시는 신궁(神宮)을 세우고 이어 숭의여대에는 조상과 자연신을 모시는 경성 신사(神社)를, 리라초교에는 노일전쟁때 만주 뤼순(旅順)전투에서 승리한 노기 마레스키(乃木)라는 군신을 모신 신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반도에 1,000여개의 신사를 설치해 30년대 이후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전쟁으로 얻은 대만, 요동, 만주, 필리핀 등 동남아지역까지 식민지에 예외 없이 관립 신사를 세우고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꾀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뒤 각 지역에 관립신사를 세우고 기존의 일본 거류민들이 건립한 민간신사도 지원했다.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 도구로서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조선신사(朝鮮神社) 정책을 세워 이 일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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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선시대 전국 봉수대의 최종역인 남산봉수대와 경비병 ⓒ데일리매거진


전국 신사의 주장격인 일왕의 조상신을 모시는 신궁터를 남산의 한양공원 일대(구 남산식물원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 자리)로 정했다. 일본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데라스 오오가미(天照大神)와 한국을 병탄하고 1912년에 죽은 메이지왕(明治王)을 신으로 모셨다.

이 한양공원은 1910년 병탄직후 서울에 명동, 회현동 등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을 위해 총독부의 강요로 고종이 기부한 땅이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 뒤인 7월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했다. 총독부는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1925년 조선신궁으로 개칭했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만주로 침략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조선인들에게신사참배를 강요해 참배자가 30년 38만 6807명에서 1942년에는 264만 8365명까지 늘어났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한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행사를 가졌다. 자신들의 신성한 신을 ‘스스로 하늘로 돌려 보낸다’ 는 의식. 이후 2달간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해 나머지는 그들의 손으로 건물은 다 태우고 계단과 주춧돌 등의 흔적만 남았다. 일본인 스스로 신사를 해체, 소각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동국대 입구에서 버스가 다니는 남쪽 순환로를 따라 올라 꼭대기에 있는 서울타워와 봉수대 교대식 등을 보고 다리가 좋지 않은 2분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 ‘남산의 맛집’으로 알려진 왕돈까스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계단을 걸어 내려와 북측 차도를 넘어서니 고종의 친필인 ‘한양공원비’가 훼손된 채 서있었다. 이 비석은 조선신궁이 서면서 사라졌다가 해방이후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에서 발견돼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비석뒷면에도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게 쪼아 뭉개놓아 ‘치옥의 역사’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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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종이 조선신궁터에 내어준 한양공원비석.고종친필인데 훼손된채 길가에 서있다. ⓒ데일리매거진


한양공원비에서 버스길을 따라 5곳의 돈까스집을 지나 내려오다 숭의여대와 숭의초교를 만난다. 교문을 지나 작은 운동장과 건물뒤에 경성신사 터가 있다. 90년대 2살터울인 두 딸이 다 숭의초교를 다녀 신사터에 세워진 '자진폐교, 일본이 경성의 심장부에 만들었던 경성신사 자리에 보란 듯이 신사건물을 직접 허물고 그 곳에 재건한 숭의' 라는 안내문을 본 적이 있다. 개신교계통의 숭의여대는 평양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자진 폐교했다. 자진폐교했던 학교가 1953년 정부로부터 경성신사터를 제공받아 서울에서 재개교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뒤에 있는 노란 건물의 리라초교와 '남산원'이라는 복지시설이 있는 곳이 노기신사터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육군을 지휘해 러시아육군에게 승리한 노기 마레스키를 모시는 신사. 그의 신사가 굳이 남산에 있는 이유는 일제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러시아가 조선을 포기하고 일본이 통감정치를 실시하는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기점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옆에 70년대 드라마센터, 90년대 이후 애니메이션센터를 헐고 다시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그 뒤에 박정희, 전두환시절 무서운 ‘남산’으로 불리던 중앙정보부, 안기부등 건물이 조선통감부 건물이다.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사살됐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5년 조선 초대통감으로 부임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탈취하는 공작을 폈던 조선통감부 자리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통감부는 조선총독부 청사로 바꿔 쓰다가 1926년에 광화문을 헐고 지어 이전했다. 해방 후 중앙청으로 사용하다 김영삼대통령 때 헐려 지붕의 돔만 천안의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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