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세상이야기/타이완기행③] 예류 지질공원과 티엔라이 온천보자 저절로 “포르모사(FORMOSA)”감탄

남영진 논설고문 기자 / 기사승인 : 2019-07-09 09: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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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융기된 퇴적암대 파도와 풍우 시달려 갖은 모양 기암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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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남영진 논설고문


[데일리매거진=남영진 논설고문] 타이완 관광 3일째는 타이뻬이 북동쪽 타이완의 가장 북쪽인 양명산(陽明山)국가공원 인근의 해안가 예류(野柳)지질공원과 티엔라이(天籟) 노천온천이었다.


타이뻬이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지륭(基隆)시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다 북동 해안으로 나갔다. 예류라는 지명이 한자로 야류(野柳)라 버들가지 휘날리는 해안 정도로 생각했다. 가보니 전혀 달랐다.


바다에서 융기된 퇴적암대에 파도와 풍우에 시달려 갖은 모양의 기암을 이루고 있었다. ‘예류’도 원주민들의 말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었다.


예류 해안에서 특이한 기암중의 하나가 왕녀(queen’s rock)바위다. 입구 쪽에 있는 것은 형상이 그렇게 예쁘지 않았지만 2코스 안쪽에 관광객이 몰려 사진을 찍는 곳은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이 어여쁘다.


이집트 고왕조 시대의 유명한 파라오 람세스2세의 왕비인 네페르티티 바위라 불렀다. 20여년 전 이집트를 갔을 때 나일강 상류 룩소르의 아부심벨신전에 람세스2세와 네페르티티 조각 동상이 우둑 서 있었다.


지질공원 해안에 우둑 솟아있는 바위가 목이 길고 머리를 뒤로 한 네페르티티 모습이었다. 코가 매부리코인 클레오파트라와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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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예류지질공원의 왕녀바위들 ⓒ데일리매거진

이집트 미녀라면 로마 공화정 말기 3두체제일 때 시저와 안토니우스의 양 영웅들을 차례로 애인으로 삼았던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리지만 이집트 현지인들은 클레오파트라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은 다르다넬즈 해협을 넘어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와 이란)의 페르시아제국 다리우스대왕 군대를 격파했다. 내쳐 이집트와 인도의 간다라지방까지 점령하고 돌아오는 길에 말라리아로 전장에서 죽었다. 그의 사후 이집트에 파견됐던 프톨레마이오스장군의 왕조가 BC1세기 로마에게 패할 때까지 존속했다.

이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 클레오파트라다. 그녀는 예수가 태어나기 바로 전 안토니우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 로마 초대황제)군에게 그리스 앞바다 악티움해전에 패했다.


안토니우스는 죽고 그녀는 자기 왕궁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와서 무덤에서 유방을 독사에게 물려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알렉산드리아의 그 무덤이 관광코스중 하나다. 그러니 현재의 이집트인들은 정복자의 후예였던 그녀를 이집트인들이 자랑으로 삼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기원전 1,500여년 전 영광을 누렸던 고왕조 람세스대왕의 부인인 네페르티티를 최고의 미인으로 꼽는다.


타이완이 서양에 알려진 건 명나라 말기 서양에서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될 16세기 초였다. 명나라 초기 환관 정화로 하여금 대 선단을 조직해 동남아,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보냈으나 이후 쇄국정책으로 바다길을 포기했다. 이 때 포르투갈의 해양왕 엔리크 왕자가 바스쿠 다가마를 시켜 1503년 아프리카의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 근대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앞서 1492년 스페인왕국을 만든 이사벨라여왕은 800년 간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이슬람왕국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몰아냈다. 그녀는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의 콜럼버스가 제안을 승인하고 대서양을 횡단해 인도로 가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산타마리아호를 출발시켰다. 이 두 해양왕국이 향신료와 금을 찾아 인도 항해로를 개척하면서 충돌을 빚자 교황의 중재로 테르도시아스 조약을 맺었다.


스페인에게는 동쪽인 아메리카를, 포르투갈은 서쪽인 인도와 아시아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했다. 남미에서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브라질은 포루투갈의 카브랄이 인도로 가려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우연히 발견해 포루투갈령이 됐다.


포루투갈인들, 타이완을 보고 ‘포르모사'라 감탄
이후 유럽에는 타이완이 '포르모사섬'으로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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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찻길위서 풍등날리는 스펀지역 상가 ⓒ데일리매거진

아시아 무역의 주도권을 쥔 포루투갈은 알투케르크라는 탁월한 해군제독의 활약으로 16세기 중반까지 인도양을 횡단해 인도의 고아, 이란의 호르무즈, 말레이반도의 말라카까지 점령했다. 이 포루투갈인들은 더 동쪽으로 나아가 향료제도인 몰루카제도와 티모르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와 타이완과 일본의 최남단인 가고시마 앞바다의 타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다.
이들이 타이완을 보고 ‘포르모사’(FORMOSA, 포루투갈어로 아름답다는 뜻)라고 감탄해 이후 유럽에는 타이완이 포르모사섬으로 알려졌었다.


포루투갈인들이 가톨릭 선교와 향료를 더 확보하기 위해 타네마시마에 교두보를 확보한 뒤 도주(島主)에게 비싸게 팔았던 조총이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영웅 오다 노부나가(職田)군대의 승전무기가 됐다. 이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田)가 이 조총을 들고 1592년 조선을 침공해 7년간 우리 조상들을 괴롭혔으니 역사는 아이러니다.


포루투갈에 이어 네델란드는 해양강국에 되어 1602년 동인도회사(전쟁과 무역을 함께 하는 주식회사)를 설립해 고아, 말라카를 포루투갈로부터 빼앗고 실론의 콜롬보를 거쳐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를 건설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쇄국정책을 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막부시대에도 큐슈동쪽의 나가사끼(長崎)를 무역항으로 허가받았다. 일본은 이 항구를 통해 근대화의 초석인 난학(蘭學:네델란드 학문)을 계속 받아들였다.


대만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양명산 계곡의 스펀지역에서 풍등날리기와 피로를 풀기위한 노천온천이었다. 거의 매일 비가 오는 날씨인데도 이틀간 비가 안 오더니 예류해변의 음식점에서 점심식사후 버스를 타고 산쪽으로 올라가는데 차창에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4인조로 나뉘어 비가 쏟아지는 기찻길위에서 가정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글씨를 쓴 풍등을 날렸다. 이어 양명산 자락의 2천여M 산이 보이는 티엔라이(天籟)노천온천에 도착했다.


온천장에 들어가자 일본인들이 개발한 스파 리조트라는 걸 금방 알았다.
곳곳에 한자, 일본어, 한국어가 쓰여 있었지만 ‘로뗀부로’(露天風呂)는 일본만이 쓰는 말이었다. 게다가 화산지대인 후지산록의 하꼬네(箱根)나 북해도 노보리베츠(登別) 노천온천의 구조와 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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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맛과 품질의 가성비좋은 일식 스시뷔페집 앞이 관광객들로 붐빈다 ⓒ데일리매거진

타이완은 석회암지대라 일본 화산지대같은 유황성분이 없어 냄새가 없었다. 그러니 화산물에 익힌 계란맛과 석회암물에 삶은 계란 맛이 달랐다. 모두 수영복차림이라 돈을 안 가져와 한 회원을 인질(?)로 맡기는 장난질을 했다.


마지막 저녁은 일식 스시뷔페였다. 그간 식사 중 최고의 맛과 품질이었다. 일본인, 현지인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한국관광객들이었다.


일본에서도 비싼 마구로와 마다이(흑도미) 사시미는 말할 것도 없고 이꾸라(연어알), 우니(성게알)초밥이 무제한 제공됐다. 후식 때 어릴 때 먹었던 단팥을 넣은 팥빙수가 있었다. 팥은 식감이 안 좋아 더운 지방 사람들을 잘 안 먹는데 일본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처럼 일본 음식이 많이 퍼진 것 같다. <타이완 양명산에서>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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